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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풍경

동구릉의 목릉&수릉

by 수니야 201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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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을 가던 날 항상 릉은 개방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구릉을 갔던 날 목릉의 릉을 개방해서 모처럼 릉의 석조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14대 선조(宣祖)왕의 릉 목릉

 

  • 14대 선조(宣祖)
  • 능호 : 목릉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600년(선조 33) 12월 22일
  • 능의구성
  •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좀 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 능의역사
  •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그 후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정자각도 세 능이 들어설 때마다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원래는 동편의 의인왕후릉 앞에 있었던 것이 후에 왕릉이 천장되면서 왕릉 앞에 정자각이 서고 왕비릉의 정자각은 헐리게 되었다. 여기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들어서자 한때 왕릉 쪽으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전이 번거롭다 하여 왕비릉은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왕릉을 향하여 서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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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릉 홈페이지에서 발췌*

     

     

     

     

     

     

     

     

     

     

     

     

     

     

     

     

     아래 사진은 추존왕 문조(文祖)왕의 릉 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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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호 : 수릉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890년(고종 27) 8월 30일
  • 능의구성
  • 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중,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석인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이 배치되었다.
  •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 문석인은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선적으로 가늘게 표현되었다.
  •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 능의역사
  •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 1846년(헌종 13)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였다.
  • 그리고는 그 해 5월 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 1855년(철종 6)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 1890년(고종 27)에는 춘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 1899년(광무 3)에는 익종은 문조익황제로,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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