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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풍경

동구릉의 건원릉&경릉&휘릉

by 수니야 201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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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1대 태조(太祖)왕의 릉 건원릉

 

1대 태조(太祖)

 

  • 능호 : 건원릉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408년(태종8) 9월 9일
  • 능의구성
  •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 능의역사
  •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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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릉 홈페이지에서 발췌*

     

     

     

     

     

  • 아래 사진은 24대 헌종(憲宗)왕의 릉 경릉
  • 24대 헌종(憲宗)
  • 능호 : 경릉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조성시기 : 1849년(철종 즉위) 10월 28일

    능의구성

    경릉(景陵)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이는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중국 등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 왕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으로 세 능침이 이어져 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을 따로 놓았다.

    봉분 아래가 초계, 중계, 하계 3단의 구획으로 이루어진 영조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문석인, 무석인이 한 단에 세워져 있다. 문무석인의 얼굴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가는 선으로 조각하여 평면적이지만 눈꺼풀과 눈동자 등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능의역사

    1630년(인조 8)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던 선조의 목릉을 천장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목릉에 수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릉을 파헤치고 현궁을 열어 보니 수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따라서 1843년(헌종 9) 춘추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경릉 서쪽에다 모셨다.

    건원릉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헌종의 국상 이후 왕릉 택지를 위하여 13곳이나 되는 길지를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1904년에는 춘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경릉의 동쪽에 모셨다. 이리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완성되었다.

     

    *동구릉 홈페이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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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 사진은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의 릉 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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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
  • 능호 : 휘릉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5-2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조성시기 : 1688년(숙종 14) 12월 16일

    능의구성

    휘릉은 1688년(숙종 14) 조성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3면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다.

    18대 현종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을 조영한지 5년 뒤에 다시 조영한 능이므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거의 비슷하다.

    난간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 열 두 방위를 표시하였다. 또한 능침 앞에 놓인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이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 영릉 이후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된 것이다.

    고석에는 귀신을 물리치길 바라는 뜻에서 도깨비를 새겨놓았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다.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가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한 단계 아래의 문석인과 무석인은 모두 2.4m에 이르는 큰 키를 자랑한다.

    문석인은 이목구비가 마멸되어 윤곽만이 남아 있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고,

    무석인은 목이 없이 얼굴과 가슴이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커서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능의역사

    1688년(숙종 14) 12월 16일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을 조성하였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양주 조씨는 1688년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8월 27일에 소렴하고, 9월 1일에 대렴하였다. 12월 15일에 발인하였다. 숙종실록 14년 12월 15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렬 왕후의 발인에 총호사(摠護使)가 재궁을 받들고 빈양문으로부터 명정전을 경유하여 나가서 진발하였는데,

    모시고 따라간 문무 백관은 모두 걸어서 따르고 임금은 소여를 타고 흥인문 밖에까지 곡하며 따라가서, 노제소에서 절하고 하직하고 돌아왔다.

    발인 다음날인 12월 16일 봉릉하였다.

    동구릉 홈페이지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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