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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풍경

덕수궁의 가을 풍경에 퐁당 빠지던 날...

by 수니야 201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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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고궁의 가을을 꼭 만나고 싶어 고궁을 찾아간다.
지난 11월 10일은 덕수궁을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이용해 시청 앞에 내리니
서울 도서관 앞에 작은 국화 축제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국화 축제 사진 몇 장을 담고
덕수궁으로 발길을 돌려 덕수궁에 들어서는 순간 헉! 깜짝 놀랐다.

덕수궁에도 가을색은 절정으로 물들어
화려한 가을 풍경이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들었던 하루


 

내 삶의 여정 세상 풍파 다 겼으며 살아왔으니
지칠 대로 지쳐 감성조차 무뎌질만 하건만



아직도 작은 것에도 감동 하며
콩닥거리는 감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또 한 감사할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숱한 아픈 상처가 있는 덕수궁이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평안한 안식과 쉼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가을 풍경에

퐁당 빠져 헤어날 줄 모르고 보냈던 하루
그 하루를 또 감사함으로 보낼 수 있었다.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그러던 중 1905년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에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907년 8월 일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에 오르게 된다.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로써 경운궁도 마침내 궁궐로써 그 기능과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때 순종은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한편 덕수(德壽)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특정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물러난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격인
셈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자, 덕수궁은 주인이 없는 궁궐이 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덕수궁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전통적인 궁궐제도에 입각한 배치형식이나 자연지세에 따른
자유로운 배치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도의 덕수궁 배치도 참고)
당시 덕수궁의 전각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궁궐의 중심부가 밀집된 동남쪽에는
대한문을 비롯 중화전·함녕전·즉조당·석어당·준명당·정관헌 등 당시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있었으며, 궁궐서쪽으로는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에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 일대와
환벽정 등이 있어, 접견실·연회장 등으로 주로 쓰였다. 북쪽으로는 선원전(璿源殿)과 혼전(魂殿)이 있던
지금의 舊경기여고터, 덕수초등학교 위치로 왕실의 제사가 치러지던 곳이 그것이다.

그밖에 덕수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 구름다리(雲橋)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북쪽의 구름다리는 러시아 공사관 언덕 위에서 경희궁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쪽의 구름다리는 중화전
남쪽 옛 영복당 자리에서 옛 법원자리로 옮겨온 의정부(議政府)와 연결하기 위한 통로였다.
고종이 승하한 뒤 3년만에 일제는 현재의 덕수궁 돌담길을 뚫고 도로의 개설, 학교, 방송국 등을 지어
덕수궁을 절단한다. 이로써 덕수궁의 면적은 더욱 축소되고 그 모습을 잃어간다.

아울러 대부분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였으며, 훼철된 덕수궁을 1933년 10월 공원(公園)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기의 원형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에 잔존하게 된 전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대한문 · 포덕문 · 건극문 · 용강문 · 생양문 · 광명문 · 중화문
○ 중화전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함녕전 동행각 일부 · 덕홍전 · 구여당(함 녕전 뒤쪽의 2층집)
· 정관헌 · 석조전

이 외에 궁성 밖 서쪽 정동 10번지에 광무 8년 4월에 경운궁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피하였던
수옥헌(嗽玉軒)이 있다. 1905년 11월 17일 한일조약을 체결한 장소이고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후에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되었고, 순종의 이어소(移御所)로
사용되다가 구미인(歐美人)의 클럽으로, 개인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건물이다.
복원공사를 거쳐 지금은 전시관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중명전과 러시아 영사관 사이에 환벽정이 있었다. 순종이 태어난 건물이 있고 명성황후의 혼전이던
경효전(景孝殿)과 순명황후의 혼전(魂殿)인 의효전(懿孝殿)도 있었다. 의효전은 창덕궁으로 옮겼다.

일제강점 이후에 궁의 서쪽 선원전(璿源殿)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를 열었다. 지금의 미국대사
관저와의 사잇길이 이것이다. 도로 서쪽에 떨어져 나가게 된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그 맞은 편, 즉 도로의 동편
제사 준비소 터에다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다.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엄비의 혼전 부근에는 그가 소유하던 과수원이 있고 제사의 준비소에는 희생(犧牲)의 도살장
제수용구(祭需用具)를 두는 건물들이 있었고 방송국의 동남방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수학원의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정동 3번지로 지금의 성공회 교회당이 있는 일대가 그 터전이다.

그러나 광무 11년의 고종 폐위(廢位) 및 융희 4년(1910) 한일합병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짐과 함께
궁궐 안의 많은 전각 문루 등이 차례로 헐리어 1935년경에 와서는 대한문(大漢門), 건극문(建極門),
포덕문(布德門), 생양문(生陽門), 용강문(用康門) 등의 궁장(宮墻) 문 안으로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즉조전, 정관헌, 준명당, 양심당, 구여당, 석조전 등의 일부 건물만이 여기 저기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각(殿閣), 문루(門樓) 등이 헐린 사이 사이에는 화단(花壇)과 초장(草場)을 만들고 잔디와
작약(芍藥), 모란 등을 심어 새로운 경관(景觀)을 이루며 이 동안 1913년 봄에는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벚나무 500그루를 진상하여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궁내를 일반에게 공개 관람하게 하니,
이제는 시민들의 소풍 산책하는 고궁으로 화하였다.

또 종래 황실의 귀빈 접대시 사용되던 석조전은 일제 미술품의 진열 전시장으로 바뀌어지며,
1936년 3월에는 다시 석조전 서쪽으로 미술관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1938년 8월에는 연건평 1,000여평의
미술관을 건립하고 창경궁박물관 소장의 미술품, 고고학자료 등을 옮겨 수장 전시하여 일반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또 일반공개가 시작됨과 함께 여기 저기에 매점, 휴게실 등이 생기니 고궁의 인상은
차츰 희미하여지게 되었다. 또 1921년에는 창덕궁 화원에 새 선원전(璿源殿)이 이루어짐과 함께 중화전에
봉안(奉安)되었던 고종의 어진(御眞)도 옮겨가니 덕수궁과 고종과의 깊은 관계도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광복을 맞으면서, 덕수궁 내의 석조전이 새로운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그 해 10월 해방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이듬해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임시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또한
1948년부터 1950년 6.25가 발발할 때까지 UN한국위원단에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54년 6월에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1955년에는 석조전 건물의 일부를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 복원하였다.
1961년 10월 정식관리기구인 덕수궁관리사무소가 설치되어 관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 1차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이 철거되고 철책으로 대체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7월 덕수궁을 사적 제 124호로 지정하였다. 다시 1968년 5월에는 서울시 도로확장공사로
시청쪽 도로에 편입되어 설치된 철책을 철거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가 덕수궁 동북담모서리에 신축되었으며, 이 공사로
덕수궁 대지 25평이 편입되었다. 7월 15일에는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 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덕수궁에서
관리하여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대통령령 제3525호) 1970년 8월에는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이설 준공되었다. 1973년부터
86년까지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으며, 98년 8월 석조전 서관이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하였다.

1992년 12월 덕수궁 관리사무소의 직제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덕수궁관리는 물론 5대궁궐 13개능원에 분산 소장되어있던 궁중유물을 한군데 집중 관리하게 되었으며,
석조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전시관도 개관하게 되었다.

2005년 8월15일 궁중유물전시관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덕수궁의 관리는 다시 덕수궁관리소에서 하고 있다.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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